Published by ICSEB at 09/11/2011
수술 날짜: 2009년 5월
저는 Diego Tasca입니다. 저는 아놀드 키아리 증후군 제1형이라고 불리는 희소병에 걸린 환자입니다. 2003년 심폐 정지가 오면서 이 병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Piove Di sacco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고 심폐소생술 후 입원 조치 됐습니다. 다양한 검사 후 이 병을 진단받았고 제게 이 이상한 이름을 가진 병은 두려움이었고 특히 “희소”하다는 점이 더 그랬습니다.
Piove de Sacco 병원에서 퇴원 후, Padova의 신경외과에 모든 검사지를 가지고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희소병이라고 해도 완벽히 알려지지 않은 병은 아니었기에 제 문제의 해결법을 확인하러 갔습니다.
제 주치의의 제안으로 신경외과 과장인 R.S. 의사의 진료를 예약했습니다. 그 진료에 (걱정을 많이 하시지만 그래도 강직한) 제가 힘들 때 항상 같이 있어주신 어머니와 함께 갔고, 저의 임상 사례를 S. 의사의 손에 맡겼습니다. 의사는 Piove de Sacco 병원의 영상 자료와 의료 진단서를 보면서 매우 침착하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두려움도 약간 진정됐습니다. 제게 전혀 걱정할 게 아니고 맹장염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후두저의 작은 절개로 끝나는 수술이고 하루 입원, 그리고 퇴원할 수 있는 수술이라고 했습니다.(정확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한, 종이에 조그마한 그림을 그리며 질병과 수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머리카락조차도 자를 필요가 없습니다.”(당연히 제가 제일 걱정했던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찌 됐든, 그 의사가 제게 용기를 심어줬고 수술 자리가 생기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Padua 신경외과에서 가장 명망있는 의사인 S. 의사의 진료였기에 공보험에서는 커버가 되지 않아 190유로를 냈습니다.
한 달 반은 제 일상으로 돌아가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수술 자리가 났다고 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그들이 말한 것처럼 짧은 입원을 위해 필요한 것을 챙겨 작은 짐을 싸고 Padua 병원의 신경외과로 갔습니다.
2003년 7월 16일에 병원으로 가서 XXXXX 환자 등록 번호를 받고 수술 대기를 위한 침대를 배정해줬습니다. 다음 날, 모든 검사를 했고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습니다. 8일이 지나고 2003년 7월 24일 C1 척추 후궁 절제, 경막 성형, 후두하 두개골 절제술을 받았습니다. 수술명을 말하는 건 쉽지만 수술 받는 것과 그걸 견디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술 후, S. 의사에 의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중환자실에서 깼습니다. 어떤 움직임에도 무감각했고 여기저기 튜브가 꽂혀있었으며 눈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저는 자문했습니다. 쉬운 수술이라고 하지 않았나?)
저는 그들이 정확히 제게 뭘 했는지, 수술이 몇 시간이나 걸렸는지 모릅니다. 일어났을 때, 시야가 흐릿해 보여서 영상들을 구분할 수조차 없었고 중환자실에 며칠이나 있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S. 의사가 한 말은 믿을 수 없기에 상당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겁에 질린 눈으로 하루종일 병실 천장을 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오늘이 며칠인지, 며칠이나 거기 있었는지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극복할 수는 있을는지.. 계속해서 이런 질문들만 했습니다.
그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이동했고 거기서 진실을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는데.. 병원 입원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계속해서 고열과 격통이 있었고 절개부위는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작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도 머리 뒤쪽에 그 부위가 아주 잘 보입니다. 주사 바늘이 꽂혀있었고 바이탈 사인 체크 기계와 반짝거리며 제 상태를 체크하던 이상한 기계들이 온몸에 연결돼 있었습니다. 지금도 미래에도 그들이 수술에서 제게 뭘 했는지 저는 잘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두개골에 판이 있다는 걸(생각하기론 플라스틱 재질) 알고 있지만 나머지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임상 병력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단지 통증과 수술 전날 그들이 제게 말했던 거짓말로 인한 후회만 기억합니다. 제 주위에 저보다 더 심한 병을 앓는 환자들이 있었기에 용감할 수 있었습니다. (혈관종, 종양 등.. )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제 증상과 질병의 중함을 그때까지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13일간 병원에 입원했고 2003년 7월 29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수술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집에서의 회복 기간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정확히 시간으로 말할 순 없지만, 통증은 기억합니다. 정말 심했습니다.
원래 이런 수술을 받고 나서의 상태는 다들 이럴 거라고 하루하루 저를 응원했습니다.
고열은 내려가지 않았고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재채기로 뇌가 터져버릴 것 같아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토하지 않고 재채기가 나오지 않길 기도했습니다. 이 두 개는 정말 치명적이었습니다.
바로 응급실에 입원했는데 그들은 왜 열이 내려가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수술의 금기나 위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레이트 물질에 대한 알레르기거나 거부 반응일 수 있다고 했으나 그들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저는 문제가 뭔지 보고 해결하려 다시 머리를 열어보려는 그들의 의도를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저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녹초가 된 상태였습니다. 어떤 종류의 치료던 닥치는 대로 받았습니다. 더 아프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 의사가 약물 요법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많이 아팠지만 목에 연결한 기계를 통해 약을 주입했더니 한결 나아졌습니다. 조금씩 더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힘든 건 지나간 듯 보였습니다. 통증으로 얼룩졌지만 그래도 보통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몇 개월 후 MRI, CT 등의 검진을 했습니다. 다 괜찮아 보였습니다. 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기 어려웠지만 3년에 걸쳐 신체와 정신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던 중, 문제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주치의를 통해 다양한 검사를 했는데 검사의 결과는 하나같이 다 정상이었습니다. 수술 경과는 아주 좋았으나 계속해서 소득 없는 검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제 정신적 문제라고 했고 얼마나 완고하게 주장했던지.. 저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미친 건 제가 아니라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 병, 질병의 악화에 대해 알지조차 못했습니다.
한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울증 관련 클리닉에 입원했습니다. 저는 정말 우울했습니다.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두 번 했습니다. 상실감을 느꼈고 저 자신이 가족에게 짐이 되는 쓸모없는 사람처럼 같았습니다.
M. 의사와 진료를 보며 제 병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클리닉에 입원을 지시했습니다. 정확한 입원 날짜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결국 그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첫 날 부터 그 장소는 감옥 같았습니다. 전혀 듣지 않는 많은 약을 복용했는데 병과 제 기분은 계속 악화만 됐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말동무가 필요했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많은 친구를 만들었습니다. 제 상태는 계속 나빠져 갔습니다. 그때까지 흡연을 안 했지만 그 장소는 저를 흡연자로 만들었습니다. 하루에 세 갑을 피웠습니다. 자유가 박탈된 우리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그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과 연락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집에서도 계속 먹을 수 있는 약과 정신과 정기 검진을 처방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제 삶은 망가진 상태였으며 통증은 계속 심해졌습니다. 상태가 이랬지만, 직장에서는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병원에서 받은 약이 제 성격을 변화시켰고 저는 더 이상 저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힘을 내서 살아갔습니다.
2008년까지 진료와 검사를 계속해서 받았습니다. 2008년, 병이 몸을 망가뜨리기 시작했습니다. 85kg이었던 몸무게가 20kg이 빠지면서 65kg까지 나갔습니다. 우울증은 저의 일부였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몸이 감각을 느끼지 못하기 시작했고 왼쪽 몸이 마비됐으며, 뜨거운 것이나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일하면서 상처가 생기는 것도 알지 못했고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걱정되기 시작해서 의사에게 이를 설명하니 정신적 문제라고 설명을 되풀이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병인지 알지도 못하다니. 의사가 아닌 저였지만 컴퓨터를 붙잡고 검색을 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제 병은 희소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한 연구소를 발견했습니다. 이 바르셀로나 키아리 & 척수공동증 & 척추측만증 연구소에서는 병에 대해 설명했고, 그들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메일로 그들과 연락을 시작했고 그렇게 저는 살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연구소에서는 Miguel B. Royo 의사의 진료 필요성과 종사 절단 수술을 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제 모든 자료의 송부를 요청했습니다. 같은 기간, 저는 Padua의 신경외과 외래 진료를 봤습니다. 의사에게 제 문제와 스페인의 수술 치료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부정적 의견이었습니다. 그는 병을 알지 못했고 그 의사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어떤 의사도 그렇게 위험이 크고 유용하지도 않은 수술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듣기만 했습니다. 제 유일한 관심은 제 문제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습니다. 시도해봐야 했습니다.
저는 스페인으로 가서 연구소에서 Royo 의사의 진료를 봤습니다. 그들은 제 문제를 정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병은 많이 악화돼 있었습니다. 의사는 CIMA 병원에서 몇 검사를 처방했고 거기서 아놀드 키아리 제1형 뿐만 아니라 왼쪽 몸의 마비에 영향을 미친 다른 심각한 병들도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척수공동증, 견인 척수증, 경추 전만증, 흉추 척추측만증이었습니다. 종사 견인이 경추 2개, 흉추 2개, 요추 2개, 이렇게 “가장 심한 상태의” 6개의 추간판 탈출 또한 일으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모든 손상을 해결해주진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같은 영상을 보고 다 괜찮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병은 이미 많은 손상을 유발하며 진행이 많이 된 상태였고 저는 더는 잃을 게 없었기 때문에 수술을 결정했습니다.
수술은 3시간이 아닌 30분이 걸렸고, 수술에서 깨자마자 저는 침대에서 힘차게 일어났습니다.
연구소에서는 검진 날짜를 정해줬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전과 다른 아픔이 있었지만 힘은 더 났습니다. 진솔하고 정직하며 친절한 의사를 만난 것입니다.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검진을 갔습니다. 또 다른 곤란한 비용이 들었지만, 저는 다시 한 번 Royo 의사 덕분에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검진에서 Royo 의사는 수술의 긍정적 결과에 놀랐습니다. 저와 함께 기뻐해 줬습니다.
저는 의사에게 양다리 움직임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이는 병과 관련은 없고, 종사 견인의 영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견인이 요추 추간판 탈출을 일으켰고 좌골 신경을 손상시켜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경근 파괴술이 필요한지 보기 위해 주사 바늘과 X 레이 기구를 이용해서 침투하는 특정 검사를 해아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게 희망을 돌려주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많은 힘을 주신 점 Royo 의사께, 연구소 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TASCA DIEGO.
이메일: [email protected]
바르셀로나 키아리 & 척수공동증 & 척추측만증 연구소(ICSEB)는 유럽 개인정보보호법 2016/679 (GDPR)을 준수합니다.
본 홈페이지의 콘텐츠는 스페인어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들의 비공식 번역본입니다. 바르셀로나 키아리 & 척수공동증 & 척추측만증 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자료로 당 사이트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용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을 지닙니다.